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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말 #13, 수요일.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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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말 #13, 수요일.

마노mano 2018. 4. 18. 11:50


* 수요일을 좋아한다, 고 하면 그건 상당히 어폐가 있는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수요일을 격하게 좋아하거나, 반기지는 않는다. 그 다음날이 목요일이고, 그러고나면 기다리던 금요일이라는 점에서는 반갑지만, 그렇다고 굳이 선호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정기적으로 출퇴근 생활을 하는 이가 평일을 좋아하기란 쉽지 않다. 좋아하지 않을 이유도 없지만, 아무튼.


* 나는 수요일에 태어났다. 초여름이었고, 월드컵 경기가 있던 날이었으며, 내가 세상에 나올 즈음 한국이 골을 넣었다고 한다. TMI지만 상대팀은 이탈리아였고, 허정무 전 국가대표가 골을 넣었으며, 조광래 선수가 자책골을 넣는 바람에 3-2로 패배했다고 위키피디아가 알려줬다. 정작 그렇게 태어난 나는 축구를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다. 내가 광적으로 열광했었고 지금도 간간히 챙겨보는 스포츠란 피겨 스케이트 뿐이다. 


* 지금 일하고 있는 일터의 식당에서는 수요일마다 맛있는 반찬이 나온다. 퀄리티의 미묘한 낙차는 있을지언정 전반적으로 맛이 꽤 괜찮은 와중에, 수요일에는 싫어하기 쉽지 않은 메뉴가 잔뜩 나오니, 생각해보면 직업인으로서의 내가 수요일을 기다리고 좋아할 이유는 충분하지 않나 싶기도. 메뉴를 확인해보니, 오늘은 볶음우동이 나온다고 한다. 빨리 쓰고 가서 밥 먹어야지, 손가락이 갑자기 빨라진다. 이럴 때만 빨라 암튼.


* 영화는 아직 보지 않았고 소설만 읽긴 했는데, 그러고보니 공지영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서 두 주인공이 정기적으로 만나는 날도 매주 수요일이었다. 소설의 아주 단편적인 문장과, 대략적인 플롯과, 한 번도 제대로 본 적은 없지만 주연을 맡았던 두 배우의 뛰어난(!) 비주얼이 희미하게나마 남은 기억의 전부지만, 작품 자체는 크게 나쁠 것이 없었다고 기억한다. 호라고는 못하겠지만, 불호는 아닌. 


* 이번에 발매된 EXO-CBX(첸백시) 미니 앨범은 7곡이 각각 하나의 요일을 뜻하는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타이틀곡은 제목 그대로 '花요일'이고, 4번 트랙 'Thursday' 전에 흐르는 다음 3번 트랙의 제목은 '내일 만나'. 화요일과 목요일 사이에 있으니 당연히 수요일을 의미하는 트랙인데, 곡 자체도 산뜻하거니와 '지금 왠지 잠이 안 와서 밤을 샐 것 같지만, 너라도 좋은 꿈을 꾸길 바란다'는 가사가 제법 달큰하다. 1번 트랙 'Monday Blues'에서 첫 눈에 반한 상대(그것도 출퇴근길에 마주쳐서 반한 뒤 그자리에서 즉석 플러팅인데, 현실에 그런 게 있을 리가.... 있으면 그것도 문제지만)와 꾸준히 썸 타는 내용이 앨범 전체의 대략적인 플롯인데, 음.... 어쨌든 내 현실에는 그런 거 없고 있을 리도 없고 하긴 이 분들 아이돌이었지 판타지를 파는 분들이었지. 정말 TMI지만 'Monday Blues'에서 '영화는 좋아해요? 지금 당장 어때요?' 라는 구절이 있는데, 버스 안임을 망각하고 순간 크게 네! 라고 답할 뻔.... 써놓고 보니 정말 쓸데 없다.


* 때아닌 마카롱 대란에 나 역시 요근래 마카롱이 땡겨서 참을 수 없는 상태였는데, 하필 최애 마카롱 가게가 월화 휴무라서 정말이지 미쳐버리는 줄. 당일 예약이 된다기에 시간 되자마자 잽싸게 예약 주문을 했고 7구 박스를 3개나 샀다. 행사가 있어서 지인을 만났던 날 같이 가서 사갖고 행사장 돌아가며 한 입 먹었는데, 지인 말대로 최애가 생각나서 그 자리에서 이름을 외치고 말았다는 초절정 TMI. 대체 그 최애가 어느 최애냐는 말은 넣어둡시다 원래 최애는 증식하는 거잖아요 웬만한 마카롱 한 개 먹는 것도 힘들어서 몸을 배배 꼬거나 커피를 두 잔씩 원샷하거나 해야하는 내 입맛에도 딱 맞았고, 앉은 자리에서 1밀**리 10개는 거뜬히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맛이어서 정말 내내 먹고 싶어 죽을 뻔했는데 오늘이 드디어 휴무 끝나고 오픈하는 수요일. 이따가 픽업하러 갈 건데 너무너무 설렌다. 지금 유명 마카롱 가게들 대부분이 문전성시라는데 이게 무슨 의문의 반사이익인지. 아, 가게 이름은 합정 '예니롱'입니다. 


* 격주 수요일에 있는 강연.... 은 아니고, 문화 클럽? 음감회? 아무튼 그런 모임이 있어서 꼬박꼬박 출석하고 있는데, 몸 담고 있는 매체 때문에라도 어쩔 수 없이 아이돌 음악에 집중할 수 밖에 없는 처지인지라 이렇게라도 다른 분야와 장르의 음악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정말이지 소중하다. 덕분에 크랜필드와 시피카(CIFIKA)를 알게 되었고, 라디오헤드와 콜드플레이를 다시 찾아 듣게 되었다. (태생이 락키드라면서 정작 요즘 너무 안 듣고 살았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잊고 살아서 미안해....) 숙제 아닌 숙제로 신곡을 꾸준히 체크하고 다음 회차에서 다룰 명반과 아티스트의 디스코그래피를 훑는 과정을 거치면서, 스스로 취향을 찾아 나선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됐다. 전투적이고 집요할 정도로 새로운 음악을 찾아듣던 시기도 있었는데, 언제부터 이렇게 소심한 겁쟁이가 되어있었는지. 아직도 새로운 음악은 조금 각오가 필요하지만, 조금씩 나아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 결론은, 이러한 이유로 수요일이 아주 조금 좋아졌다는 말. 그래서 아주 조금은, 수요일이라는 다소 어정쩡하고 애매한, 딱 중간에 놓여있고 좋아하기 쉽지 않은 날이 기다려지게 됐다는 말. 드디어, 수요일이다. 




새까만 평일도 너를 덧칠하면 불타는 주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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