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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말 #16, 도쿄에서의 마지막 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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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말 #16, 도쿄에서의 마지막 밤.

마노mano 2018. 6. 8. 01:35


* 도쿄에서의 7일 간의 일정이 어느덧 끝나간다. 라고는 해도 아직 오사카에서의 3일 간의 일정이 남아있긴 하지만. 아직 더 보고 싶은 것이 남아있는데 떠난다니 서운한 마음 반, 빨리 일정을 마치고 그리운 내 방에서 푹 쉬고 싶은 마음 반. 


* 첫 3일은 이번 일본 방문의 주목적이었던 친구의 결혼식 덕에(비행기값은 이미 냈으니 대신 호텔비라도 보태게 해달라면서) 좋은 호텔에서 묵었고, 나머지 4일 간은 에어비앤비에서 찾은 게스트하우스에서 보내기로 하여 오늘이 마지막 밤. 다양한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젊은 매니저들은 친절하게 많은 것을 도와주었고, 리빙룸에서 투숙객들이 함께 보내는 시간도 제법 안온해서 벌써 정들었나 싶기도. 한 명은 기타로 근사한 곡조를 즉석에서 만들어 연주하고 있고(알고보니 프로 연주자라고 한다), 매니저들은 노트북과 핸드폰으로 각자 할 일을 하고 있으며, 나머지 투숙객들은 카드게임을 하며 화기애애하게 떠들고 있다. 하지만 도미토리는 여전히 적응이 안 된다. 분명 도미토리 아니라고 했던 거 같은데 나 뭔가 속은 기분이야. 다행히 아무런 방해 없이 잠은 잘 자고 있지만서도, 샤워시설이 최악이라 10분 거리의 온천에서 목욕을 해결해야 했던 건.... 역시 다음번에는 돈이 들더라도 차라리 호텔을 잡자. 역시 싼 게 비지떡이야.


* 피로가 누적된 탓인지 아니면 습기차고 더운 날씨 탓인지, 지금까지는 안 그랬는데 오늘따라 짜증이 좀 많이 났더랬다. 여행지에서의 나름의 원칙 중 하나는 이어폰을 꽂지 않는 것인데, 자연스레 들려오는 일상의 소음도 여행의 즐거움을 위한 일부라 생각하기 때문. 그런데 오늘은 도저히 참지 못하고 소음을 차단하기 위해서 이어폰을 끼고 말았다. 아픈 발을 질질 끌고 신주쿠에 있는(TMI지만 도쿄에 있는 내내 신주쿠를 가지 않은 날이 없다. 제발 그만 가고 싶은데, 불행히도 나는 내일 신주쿠를 또 가야한다....) 츠타야 북 아파트먼트에 가서 폰 충전도 좀 하고 편안한 간이 침대에 몸도 누이고 하고 있었는데, 몇 없는 손님들이 자꾸 킬킬대는 소리를 내서 이상하게 거슬리는 거다. 거기서 짜증이 확 나서 이어폰을 꽂고 부랴부랴 플레이리스트를 뒤졌는데, 왠지 기분이 아주 가라앉은 것도 그렇다고 들뜬 것도 아닌 어중간한 상태여서 생각나는 게 결국 파리스 매치. 그래도 도쿄의 밤 공기와 제법 잘 어울리는 선곡이었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 이용시간 한 시간을 채우고 숙소로 가기 위해 바쁘게 역으로 향하는 동안 계속 파리스 매치를 듣고 있었는데, 음악이 지친 마음을 위로해준 덕인지 아니면 바람이 시원했던 덕인지 기분이 다시 풀어져서 기분 좋게 거리를 활보했다. 짜증으로 가득했을 때는 시들시들 시시해보이던 거리가 갑자기 다시 색깔을 되찾고 반짝반짝 빛나보였다. 내가 사랑하던 바로 그 도시의 모습이었다. 


* 원래는 오전 중에 신주쿠 교엔을 가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언어의 정원' 성지를 순례해보려고 했는데, 아침 산책 겸 20분 정도 떨어진 호텔 카페테리아에 가서 조식을 먹고 출발하니 시간이 약간 애매해서 결국 메구로강가의 가로수길을 천천히 걸었다. 숙소에서 역이 그리 가까운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굳이 걷기를 고집하는 것은 강을 바라보는 것이 꽤나 즐겁기 때문. 강물 위에 벚나무가 잔뜩 드리워져 있는데, 신록이 우거진 모습도 제법 근사하지만 벚꽃이 흐드러지면 아마 그것도 굉장히 장관일 테지. 강 곁에도 벚나무 가로수길이 있는데, 훌륭한 산책길인 것은 물론 주민들의 러닝 코스이기도 한 모양. 마침 하루종일 쏟아지던 비가 그친 뒤 맑게 갠 하늘에서 내린 햇살이 나무 틈으로 들이치는 것이 정말로 아름다워서 떠나기 싫었다. 약속만 아니었다면 몇 시간을 그 곳에서 보냈을지도.


* 롯폰기에서 R을 1년 만에 만나 식사를 했다. 작년에도 보긴 했지만 그건 R이 휴가 중이었을 때고, 이번에는 업무 중 점심시간에 잠시 만나기로 한 거라 완전히 '사회인'의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 꽤나 신선하기도 하고 생경하기도 하고. 안부를 묻고, 나이 이야기를 하고, 일 얘기를 하고, 추억팔이도 좀 하다가 각자의 사랑 이야기도 하며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잠시 주변을 거닐었다. 내 청춘의 제법 큰 조각을 가져간 소중한 친구. 그가 언제까지나 행복했으면 좋겠다. 


* 국회도서관을 둘러보고 긴자에서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문구점에 들러 약간의 쇼핑을 한 뒤, 책과 술을 함께할 수 있는 공간을 찾아 꽤나 먼 길을 돌아 자그마한 서점을 찾았는데 그 어느 것도 결과가 그리 만족스럽지는 못했다. 어제는 몸이 힘들었을지언정 그만큼 보람도 컸던 날이었는데그야 그렇지 덕질을 그렇게 했으니 뽕이 차는 게 당연하지, 오늘은 묘한 '현타'를 맞은 기분이라고 해야하나. 발은 아파 죽겠고 짐은 많고 땀은 계속 나고, 기분이 좋을 수가 없긴 했다. 나름 아침부터 강행군이었기도 했고. 


* 숙소 근처에 있는 온천은 도쿄에서 몇 안 되는 천연 온천이라고 게스트하우스 매니저가 알려줬다. 오늘도 폐장 30분 전에 아슬아슬하게 도착해서 거의 욕탕에 몸을 던지듯 뛰쳐들어가 한참을 멍때리고 있다가, 결혼식에 같이 참석한 유학시절의 친구가 반우스개로 '온천이라니 너 완전히 일본인 아니냐'고 했던 게 생각이 났다. 뭐, 엄밀히는 외국인이니 동네에 있는 조그마한 온천을 뻔질나게 드나드는 게 신기하기도 하겠다만, 한국인도 만만찮게 목욕의 민족이라고 설명해줄걸 그랬나 싶기도 하고. 


* 다른 친구 왈, 나는 한국에 있으면 있는대로 일본에 있으면 있는대로 너무 자연스럽게 잘 녹아든다고. 한국은 로컬의 입장이니 당연하지만서도, 일본에서도 로컬처럼 보인다고 해서 그래? 하고 말았다. 오늘도 블라우스와 원피스를 입고 또각또각 소리가 나는 단화를 신고서 가방에 장바구니까지 들고 있었으니, 영락없이 퇴근길 직장인처럼 보였기도 하겠다. 좋은 걸까, 나쁜 걸까. 내일부터는 좀 일부러라도 관광객인 척을 좀 해봐야하나. 아 근데 어차피 오사카 잘 모르니까 반강제적으로 관광객 모드네. 


* 더 쓰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던 거 같은데 너무너무 졸리다. 내일은 이동시간도 길 테니, 이르진 않지만 조금이라도 빨리 자야지. 안녕, 도쿄. 한동안 그리울 거야. 겨울에 또 볼 수 있으면 좋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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