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o, the bewitched

아무말 #18, 밤산책. 본문

anywords

아무말 #18, 밤산책.

마노mano 2018. 8. 10. 23:32


* 歩けよ乙女夜は短し。걸어 아가씨야 밤은 짧아. 원작을 본 적은 없지만, 이유 없이 이 문장을 좋아한다. 밤은 짧아, 그러니 걸어. 걷는 행위, 그중에서도 밤에 걷는 것을 사랑하게 된 나를 기분 좋게 재촉하는 한 줄.


* #오늘의_밤산책송이라는 해시태그까지 만들어서 그날 그날 밤산책의 길벗으로 삼은 곡을 짬짬이 소개하고 있다. 소개한 곡보다 실제로 들은 곡이 더 많긴 하지만, 최대한 실시간으로 그때 그때 짤막한 소개글을 덧붙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8월 10일 현재까지 소개한 곡은 약 70곡 정도. 선곡 기준은 당시의 기분+걷는 템포에 적절히 맞는 BPM이라는 다분히 주관적인 기준. 누가 보긴 하나? 싶은 마음에 중단할까 하다가도, 잘 보고 있다는 피드백이 종종 오곤 해서 어떻게 지금까지 지속해오고 있다. 어쨌든, 누군가 보아주는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이 조금이라도 무언가를 얻었다면, 그것만으로 지속할 이유는 충분한 것이니까. 


* 걷는 것을 처음부터 좋아했던 것은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덜 걸으려고 기회비용을 지불해가며 택시를 고집하던 때도 있었고. 글쎄, 정확한 계기는 알 수 없지만 얼마 전 알게 된 제인 오스틴과 브론테 자매의 작품과 관련된 이야기가 일부 기여한 건 확실한 것 같다. 트위터에서 본 거였는데, 정확한 내용은 아니지만 대략적인 요지는, 당시 영국에서 여성이 혼자 길을 걷는다는 것이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았던 시기에 작품 속 여성 인물들이 먼 길을 걷는 장면이 종종 묘사되었고, 이에 여성 독자들이 브론테 자매 생가까지 걸어가는 행위를 신성시하게 되었다는 것. <오만과 편견>에서 언니가 너무도 걱정된 나머지 리지가 빙리 가(家) 저택까지 멀고 먼 길을 걸어갔다가 저택에 있던 빙리 가문 사람들이 경멸에 가까운 경악을 표했던 게 내내 의문이었는데, 그 이야기를 듣고 단박에 그 의문이 풀렸다. 와중에 리지도 대단하지만 거기서 리지한테 반한 다아시는 정말이지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구나 싶고. 아무튼 그런 연유로 제인 오스틴에 대한 애정도가 급격히 상승했고, 걷는 행위가 왠지 모르게 소중해졌다. (물론 이제는 그런 시대가 아니긴 하지만) 걷는다는 것 자체가 반사회적이라니, 왠지 멋지다. 아직도 내 안에 반항의 피가 흐르나보다.


* 주로 걷는 코스는 집 근처 공원. 본래라면 마을버스를 타고 올라가야 하는 다소 가파른 길인데, 길고 긴 배차간격과 운전수의 불친절에 지쳐 개척한 귀가길이라고 할까. 바로 옆에 있는 도로와는 달리 경사가 완만한 편이라, 느린 템포로 여유롭게 걸어 올라가기엔 딱 좋다. 일을 하던 때는 퇴근길에 잠시 짬내어 즐길 수 있는 '소확행'과 여유의 시간이었고, 퇴사한 이후인 지금은 부족해진 활동량을 채우면서 동시에 짧은 사색에 잠길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한 곡을 듣더라도 온 신경을 다해 집중할 수 있어서, 익숙한 곡이 불현듯 새삼스레 다가오기도 한다. 


* 걷는 것을 즐기면서 아주 좋은 순기능도 경험하게 되었는데, 바로 체중 감량. 일본 여행을 하면서 최대 38000보(!), 총 20만보 정도를 걸었고, 하루에 타르트 세 개를 홀로 해치우거나 수제 햄버거에 맥주를 곁들이는 등 다이어트의 금기를 숱하게 어겼음에도 무려 3.5키로(!!!)를 감량하는 놀라운 결과를 얻었다. 허기와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입에 대서는 안 되는 것을 섭취하고 난 다음에도 한참을 걷다 귀가하면 신기하게도 체중 변화가 크지 않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렇다고 허구헌날 먹고 무작정 걷기만 한다고 능사는 아니지만. 요즘도 웬만하면 만 보는 꼭 채우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일부러 한 정거장 정도 미리 내려서 걸어 간다던가, 공원을 한 바퀴 더 돈다거나 하는 식으로. 그러니 여러분, 걸으세요. 최대한 많이. 힘이 닿는 만큼. 걸을 수 있는 동안에는.


* 무작정 걷고만 싶어지는 그런 날이 있다. 바람도 시원하고 공기도 달고 이유 없이 들뜨는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어, 걷고 걷고 또 걸으며 그대로 집까지 가보고 싶어지는 그런 날. 듣고 있는 음악이 마냥 황홀하고, 그 순간과 맞닿아 있는 주변의 풍광이 너무도 사랑스러운 나머지 그것들과 헤어지기 아쉬워지는 날. 날이 더워지면서 그런 낭만을 즐기기 힘들어졌다는 것이 조금 아쉽기도 하다. 언제쯤이면 날이 시원해질까. 늦여름의, 더위가 한풀 꺾여 서늘해진 바람을 맞으며 듣고픈 곡이 많은데. 시원한 바람을 만끽하며 날이 새도록 한없이 걷고 또 걷고 싶은데.



있지, 그러니까 오늘은 산책하러 가자. 아무도 없는 밤길을.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