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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말 #17, 귀국.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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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말 #17, 귀국.

마노mano 2018. 6. 10. 21:29


* 이것을 쓰고 있는 지금, 나는 오사카 상공을 날고 있다. 10일간의 일정을 마치고, 완전한 귀국. 솔직히 가고 싶지 않다. 하루만 더 있을까 싶은 생각도 들고. 그러나 그랬다간 얼마 있지도 않은 가산이 거덜날 지경이니, 얌전히 돌아가서 다시 일상을 충실히 보내야지. 


* 간사하게도 사람 마음이 참 그렇다. 막상 떠나기 직전까진 준비며 이것저것 귀찮아서, 가지 말까? 하는 마음이 들다가도, 결국 마지막은 이렇게 가기 싫다고 곡소리를 하고 있는 걸 보면. 그렇다곤 해도 이번 여행은 정말 특별히 재미있었다. 거의 스무 번 가까이 여행한 나라고, 열 번 넘게 놀러간 도시고, 한 번은 살아보기까지 한 곳인데도, 이상하게 갈 때마다 새롭고 신선하고 즐겁고.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이번 여행은 특히 매일이 즐겁고 행복했다. 항상 겨울에만 가다가 처음으로 여름에 와서 그런가. 이상할 정도로 텐션이 내내 높아져있는 상태였고, 눈에 담는 것 하나하나가 유달리 새로워보였다. 그래서 인스타 스토리를 사진과 영상으로 도배해댔지만 스토리 빌런이 또! 그간 벌어놓은 돈을 거의 다 까먹고 말았지만, 한동안 힘내서 달려나갈 추억과 동력을 얻었으니 괜찮...은 거겠지? 언제 또 가지, 빨리 돌아가고 싶다. 휴.


* 여행이 즐겁고 짜릿한 이유는, 누군가에게는 극히 일상적인 시공간에 비일상적인 존재로서 침범한다는 것에 있다고 생각한다. 누군가에게는 삶의 터전이고 늘상 지나치는 일상이지만, 나에게는 일탈이고 비일상이라는 그 점이. 똑같은 길도, 누군가에게는 등교길이고 출근길이지만 나에게는 완전히 새로운 풍경이니까. 반대로 나의 일상이 누군가에게는 비일상적인 무언가가 되기도 하는 거겠지. 


* 일상의 소리마저도 귀에 담아두고 싶어서, 여행길에서는 이어폰을 잘 꽂지 않는 편이다. 이건 전에도 이야기한 것이지만. 아주 가끔 심리적 이유로 인해, 혹은 안정을 찾기 위해서 소음 차단 목적으로 찾거나, 이동시간이 길어 달리 할 일이 없을 경우를 제외하고는 여행지에서 이어폰을 사용하는 일이 드물다. 도쿄에서 마지막 밤을 보낼 때 이상하게 짜증이 솟구쳐서 파리스 매치를 찾았고, 신칸센을 타고 오사카를 향해 달려갈 때는 스쳐지나가는 풍경과 그날의 날씨며 공기같은 것들이 스피츠와 스가 시카오를 생각나게 했고, 귀국하는 공항에서는 소음을 원천봉쇄하기 위해 퍼퓸을 찾아 들었다. 아, 그리고 오사카에서 찾은 맛집 라멘 가게에서 미스치루 노래를 듣고 생각나서 몇 곡. 무척이나 사랑했지만, 한동안 잊고 지냈던 음악들. 잊고 지낸 것이 왠지 미안해졌다. 오랜만에 꺼내 들어서 그런가, 여행지에서 듣는다는 묘한 일탈감 때문인가, 아니면 낯선 풍광과 맞아 떨어져서인가, 왠지 평소와는 다른 느낌으로 다가와서 무척이나 새로웠다. 이 역시 여행의 묘미인 거겠지.  


* 식사가 나왔고, 부실하기 짝이 없는 내용에 실망하며 먹는둥 마는둥 하고 대신 맥주를 주문해 홀짝이며 스가 시카오의 '光の川'와 ’愛について'를 들었다. 술을 마셔서 그런가, 평소와 다르게 들리는 건 기분 탓인지. 이래서 술을 못 끊겠는데, 안타깝게도 내일부터는 다시 금주의 나날이다.... 집에 가면 쟁여놓은 호로요이나 마셔야지. 흑. 


* 비가 올 때부터 알아보긴 했는데, 역시 기상 상황이 안 좋은지 끊임없이 흔들린다. 별로 무섭거나 겁나거나 하는 건 아니지만, 왠지 모르게 갓세븐의 '하드캐리'를 들어줘야 할 것 같.... 역시 아닙니다. 


* 평소 같으면 귀찮아서 안 했겠지만, 이번에는 특별히 여행기를 정리해서 올려볼까 한다. 인스타 스토리에 미주알 고주알 올려놓은 게 있으니, 그걸 토대로 정리하면 될 거 같고. 특별히 즐겁고 행복하고 충실했던 여행이기에, 어떤 방식으로든 글로 정리해보고 싶어졌다. 사실은 그때 그때 정리해서 올렸으면 가장 좋았겠지만. 


* 아까 전에 이륙한 것 같은데 어느덧 벌써 도착이다. 사실은 원고도 좀 하려고 했는데 망.... 오늘은 일단 푹 자야지. 조금 있으면 또 한 살 나이를 먹는다. 사실 언젠가부터 생일이란 그다지 달갑지 않은 날이 되어 있었고, 매년 돌아오는 악몽같은 기억 탓에 생일 즈음에는 무척이나 우울해지곤 했지만, 이번 여행 덕에 그런 것을 조금은 덜어낼 수 있었던 것 같고. 아예 생일도 거기서 보내버리는 게 좋을 뻔 했나 싶기도 하지만 그건 이미 지난 일이니. 


* 착륙하면서 뭔가 엄청 빛나고 있길래 밖을 봤더니 서울이었다.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이렇게나 밝다니. 평소 같으면 예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 오늘은 왠지 모르게 심란해졌다. 


* 아무튼, 이번 여행은 여러가지 의미로 참 특별했다. 한동안은 추억에 젖어 지내겠지. 그것이 당분간 힘내서 달려갈 힘을 줄 거고. 또 한 번 달려가보자. 힘차게.



언제라도 이 곳에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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