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o, the bewitched

아무말 #15, 퇴사. 본문

anywords

아무말 #15, 퇴사.

마노mano 2018. 5. 31. 15:01


* 나는 오늘 퇴사한다.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고, 계약이 만료되었기 때문에 전임자에게 다시 바통을 넘기고 떠나는 것. 얼마 안 남았다고 며칠 전부터 손 꼽아 기다렸기 때문에 신나고 좋기도 하지만, 막상 닥치고 보니 왠지 시원섭섭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 버릴 것은 버리고 챙길 것은 챙기고, 쓰레기통도 비우고 뒷정리도 하고 남은 업무를 해결하며 짐을 꾸리고 있으려니, 기분이 참 이상하다. 퇴사가 처음도 아니고 상당히 많은 직장을 전전해오며 이젠 익숙해졌겠거니 했는데, 그게 아니었나보다. 


* 물론 책도 좋아하지만, 사실은 '책이 있는 공간'을 열렬하게 사랑하는 쪽에 가깝다. 책을 좋아하는 마음과 책이 있는 공간을 동경하는 마음으로 전공을 공부했고, 전공을 살리지 못하는 기간을 꽤 길게 겪었다가 드디어 자리를 잡게 된 셈. 당장은 이 곳을 떠나지만, 일단 경력 한 줄이 생겼으니 다음 근무처에 대한 걱정은 한결 덜었다. 그 경력 한 줄 만드는 게 이렇게 힘들었다. 나 너무 수고했다, 정말. 


* 요시모토 바나나의 '키친'의 첫 단원에 이런 문장이 있다. '나는 죽는다면 부엌에서 죽고 싶다'는. 어떤 모습이든 어떤 종류든 '부엌'의 모습을 한 공간을 끔찍하게 좋아하다 못해, 유일한 혈육인 할머니를 잃고 불안감에 잠 못 이룬 채 여기저기 자리를 옮기다 결국 부엌에서 잠드는 것이 가장 편하다는 것을 알게 될 정도. 나도 '책이 있는 공간'이라면 뭐든 좋아한다. 압도될 것 같은 웅장하고 큰 도서관도, 포근하고 아담한 도서실도, 퀘퀘한 헌책 냄새가 나는 책방도, 쾌적한 공기 속에서 사람들이 느긋하게 책을 구경하는 대형 서점도, 커피와 빵 냄새가 함께 나는 북카페도. 도서관에서 죽는 것은 아마 불가능하겠지만(가능하다고 해도 내가 싫을 것 같고), 적어도 '책이 있는 공간'이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해본 적도 있었다. 으리으리한 서재까진 아니더라도, 아무튼 책이 가득한 공간. 그곳이 내가 마지막으로 숨을 쉬는 공간이었으면 하고. 


* 나는 늘 도서관에서 일하고 싶었고, 그래서 조그마한 공간이라고 할지라도 이 곳이 온전히 나만의 일터이며 놀이터라는 사실이 정말로 기쁘고 행복했다. 일이지만 힘든 줄을 몰랐다. '천직'이란 이런 것을 말하는 건가 싶었다. 가능하다면 계속 지속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떻게든 지속할 생각이다. 합격하진 못했지만, 얼마 전 어느 구직 면접에서 면접관이 정말로 이 일이 맞다고 확신하냐는 질문에 0.1초도 걸리지 않고 네, 라고 즉답했던 것을 기억한다. 오랜 방황 끝에 드디어 손에 넣은 확신이라, 놓고 싶은 생각은 없다. 반드시, 지속할 것. 반드시.


* '디즈니 키드'로 자란 내가 열 손가락 안에 꼽는 명작 중 하나는 '메리 포핀스'다. 생각해보면 나의 버킷리스트인 '전 세계의 도시에서 단기간 거주해보기'라는 꿈은 메리 포핀스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기도. 바람의 방향이 바뀌면 왔을 때처럼 다시 우산을 쓰고 바람처럼 사라지는 메리 포핀스를 내심 동경했던 것 같다. 하늘을 나는 우산도 뭐든 들어가는 마법의 가방도 없지만, 아무튼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나는 정든 이 곳을 떠난다. 아주 조금 센치해졌다. 그러다가 상사가 갑자기 안 걸어도 되는 태클을 거는 바람에 좀 빡이 쳤었지만 아무튼


* 아닌 게 아니라 내일은 정말로 날아가는 날이네. 일본 간다.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덕질도 열심히 하고 사람도 많이 만날 생각. 우선은, 역시나 오랜 버킷리스트였던 '도서관과 책방과 북카페 유랑하기'를 실행하려고 열심히 코스를 짜고 있다. 원래는 무계획파지만, 스케줄 짜면서 이렇게 즐거웠던 적이 없다. 역시, 나는 책과 그 책이 있는 공간이 정말로 좋다. 이 일을 반드시 지속해야할 이유는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Goodbye, Mary Poppins. Don't stay away too long."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