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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말 #14, 서른 이후의 삶에 대하여.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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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말 #14, 서른 이후의 삶에 대하여.

마노mano 2018. 5. 8. 15:31


* 그러고보니 그랬다. 나 스스로가 30대의 비혼 여성이면서, 결혼 이외의 삶을 선택한 '평범한' 여성의 삶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저 트윗을 보고서야 비로소 들었다. 일단 내 주변의 30대들은 대부분이 결혼을 했거나 적어도 연애 중이므로. 망설이다가, '이렇게 사는 사람도 있답니다'라는 의미로 짧은 트윗을 남겼다. 삶에 있어서 너무 늦은 것은 없답니다, 서른이 넘어서야 적성과 천직을 찾은 저 같은 사람도 있는 걸요. 


* 20대는 그럭저럭 즐거웠지만, 행복하다거나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고 느끼진 못했다. 왜였을까, 곰곰히 생각해보니 나를 옭아매고 있던 '인정욕구'와 완벽주의자적 기질의 무언가가 문제였지 않았나 싶다. 어차피 안 될 것이라는 무력감과, 주변에서 나를 좋게 봐주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초조감과, 요만큼이라도 만족스럽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적인 무언가와, 그런 것들이 얼마 있지도 않은 내 자존감을 끊임없이 갉아먹었다. 몸무게가 조금이라도 늘어나면 우울하고 불행했다. 남들은 다 하는데, 남들은 다 가진 것 같은데 못 하고 못 가진 기분이 들면 그렇게 억울했다. 이런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다고 자책하며, '모쏠'인 스스로에 대한 자기혐오가 극에 달해 있던 시기였다(그렇다, 대부분의 여성들은 그 화살을 자기 자신에게 돌려버린다. 여성들에게 화살을 돌려버리는 일부 남성들과는 달리!). 지금 와서 보면 왜 그랬지, 싶어지지만 그렇다고 그때의 나를 부정하거나 바보 같다고 생각하지는 않으려고 한다. 어쨌든, 그것도 전부 다 '나'였으니까. 그 시기를 겪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는 셈이니까.


* 대학을 입학하자마자 들었던 동아리를 얼마 못가 그만두면서 인간 관계에 대한 깊은 환멸을 느꼈고, 인생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듯한 절망으로 이어졌던 나에게 이웃 대학 연극 동아리는 구원과도 같았다. 힘껏 매달렸다. 생각해보면 그것은 결코 '지속 가능한 낙원'이 아니었지만, 그때는 그저 연극과 동아리와 사람들이 재미있었고 일상의 전부였으니까. 그 시간이 어리석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그것에 너무 함몰된 나머지 다른 좋은 것들을 미처 보지 못한 것은 아닐까, 아쉽기는 할 뿐이다.


* 무언가를 터닝포인트로 급격하게 바뀐 것은 아니었을 테고, 이런 저런 일을 겪으면서 조금씩 단단해지고 여물어간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유학을 떠나서 인생 처음으로 오롯이 혼자 산다는 것을 체험했고, 첫 일터에서 호된 사회생활 신고식을 치렀으며, 첫 연애와 첫 이별을 경험했고, 많은 만남과 이별(때로는 영원한 것도)을 겪었다. 수 많은 '처음'과, 경험과, 만남과 이별과, 듣고 보고 접한 것들이 켜켜이 쌓였다. 치열하게 살던 시기도 있었고, 방황하며 늘어지기만 하던 시기도 있었다. 그 어떤 것도 모두 '나'였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것들이 모두 쌓여서, 비로소 나니까. 


* '청춘은 아름답고 눈부셔야 한다'는 강박에 가까운 시선들이 내 20대를 옥죄고 있진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요네자와 호노부가 <고전부 시리즈>에서 밝혔듯, '청춘은 반드시 장밋빛이기만 한 것은 아닌'데도. 내 청춘은 어쩐지 그늘지고 비틀어지고 구깃구깃한 것이었지만, 그것도 청춘을 사는 군상 속 하나의 모습인 것을. 그리고 나는, 바로 지금 이 순간 가장 빛나고 있다고 단언할 수 있다. 20대를 지나, 30대 들어서 비로소. 30대 들어서 인생이 정말로 즐겁다. 누가 '스물 아홉, 파티는 끝났다'고 했어. 사실 파티는 서른부터였는데. 


* 누구더라, '스물'은 ㄹ받침이니까 아직도 가능성이 열려있고, '서른'은 ㄴ받침이니까 가능성이 닫힌 채 안정성을 추구해야 하는 시기라던가, 그런 비슷한 말을 했던 것 같은데.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오히려 나는 서른 넘어서야 스스로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볼 줄 알게 되었고 믿을 수 있게 되었으니까. 서른이 넘어서야 드디어 내 적성이 무엇이고 가장 맞는 일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으니까. 말마따나 백세시대라는데, 백 년 중 삼십 년이 대체 얼마나 된다고. 어차피 인생은 그 자체가 모험 아니던가. 


* 결혼과 연애에 대한 가능성을 아주 접은 것은 아니지만, 일단 나 스스로는 비혼주의를 선택하고 있다. 예전처럼 '나 같은 것을 좋아해주는 사람이 없을 것 같아서'가 아니라, '나를 있는 그대로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면 안 되니까'라는 생각으로. 서로의 일상에 서로가 존재하는 삶이 진심으로 좋다면야 더할 나위가 없겠지만, 그럴 수 있는 사람을 아직은 찾지 못했으므로. 결혼을 꼭 해야만 하는 통과의례로 규정하고, '이 시기에는 결혼을 해야하는데 마침 적당한 사람이 있으니까 한다'는 식으로 타협하는 건 일단 나의 삶이 아님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곁에 누가 있다면 그건 또 나름의 행복이겠지만, 나는 지금 혼자여도 충분하고 넘칠 정도로 행복한 걸. '에이, 설마'라며 나의 이 행복을 굳이 반박하려는 자에게는 딱히 할 말이 없다. 겪어 보지 않았다고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랍니다.


* 아직도 무엇이 진정 '지속 가능한 낙원'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나는 지금 나의 일이 좋고, 내가 듣고 보고 말하는 것들이 좋고, 내 삶과 나 자신이 좋기에 이것을 일단은 지속하고 싶다고. 나는 분명, '바로, 여기, 지금' 가장 빛난다. 남이 어떻게 보아줘서가 아니라, '그저 내 자신이 이렇기 때문에'. 누가 뭐래도 만족할 수 없었던 삶으로는 이제 돌아가고 싶지 않다. 누가 뭐래도 나는 내가 가장 예쁘고 빛나는 걸. :)


* 내일의 나는 오늘 만큼 빛나지 않을 수도 있다. 빛을 잃고 한껏 주눅들어 시들해져 있을 수도 있다. 그조차 '나'이기에, 괜한 자기혐오는 하지 않으려고 한다. 어쨌든 하고 싶은 것을 힘껏 해내고, 말할 수 있는 것을 최대한 말하며, 지금 여기서 가능한 방식으로 나 자신이기를, 반짝반짝 빛나기를 지속해가려고 한다. 10년 후의 삶은 또 다르겠지만, 어쨌든 지금은 그것을 목표하며 살아보려고 한다. 지금, 여기, 나만의 방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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